결국은 용기의 문제였다 — 상담실에서 다시 만난 아들러, 열등감을 딛고 나로 서기까지. 구영준 지음

차례


프롤로그 — 저는 원래 이래요

닫힌 문 앞에 놓인 빈 의자 세 개

상담실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와 앉는다. 나는 늘 같은 자리에서 같은 표정으로 그를 맞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첫 마디는 자주 비슷하다. "제가 원래 이런 사람이라서요." 그 말 뒤에는 대개 설명이 따라붙는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고, 집안 내력이 그렇다고, 형이 있어서 늘 뒷전이었다고,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가 여기까지 온 거라고. 처음 상담을 시작했을 때는 나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 그렇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역사가 있고, 그 역사가 지금의 그를 설명해준다고 믿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면서 나는 조금씩 다른 질문을 품게 되었다. 정말 그 사람은 "원래" 그런 걸까. 아니면 지금, 어떤 이유로 그렇게 살기로 "선택"하고 있는 걸까. 이상한 것은, 같은 상처를 지닌 두 사람이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경우를 나는 상담실에서 수없이 보았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은 그 상처를 딛고 앞으로 나아갔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상처 뒤에 완전히 몸을 숨겼다. 무엇이 이 둘을 갈랐을까. 과거가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그 질문을 붙들고 있을 때 다시 만난 것이 아들러였다. 대학 시절 교과서 속 한 줄로 스쳐 지나갔던 그 이름을, 상담실에서 다시, 아주 다르게 만났다. 아들러는 인간의 행동을 과거의 원인이 아니라 미래의 목적으로 설명하려 했던 사람이다. "왜 그렇게 됐는가"보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는가"를 물었던 사람. 그 질문 하나가 내가 상담실에서 오래 붙들고 있던 물음에 뜻밖의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아들러 이론을 순서대로 설명하는 개론서는 아니다. 나는 학자가 아니라 상담실에서 매일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 책도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 이론이 아니라, 상담실에서 마주친 얼굴들에서. 형이 있어서 자신은 늘 뒷전이었다고 말하던 사람, 완벽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말하던 사람, 다섯 살의 어느 하루를 유난히 또렷하게 기억하던 사람.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빌려, 아들러가 남긴 개념들 — 목적론, 열등감, 사회적 관심, 생활양식, 격려, 용기 — 을 다시 풀어보려 한다. 물론 이름과 상황은 모두 바꾸었다.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여러 사례를 뒤섞고 다시 짜맞추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마음만은 손대지 않았다.

돌아보면, "저는 원래 이래요"라는 말은 어쩌면 가장 정직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다 — 지금의 자신이 어딘가 불편하다는 것을. 다만 그 불편함을 감당하기보다, "원래 그런 것"으로 못박아버리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것이 잘못이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나 역시 살아오면서 그 말을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했다. 그러니 이 책은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을 향한 비판이 아니라, 그 말 뒤에 숨은 낙담을 함께 들여다보자는 초대에 더 가깝다.

이 책은 아홉 개의 방을 지나간다. 원인이 아니라 목적을 묻는 방에서 시작해, 열등감이라는 오래된 손님을 다시 마주하는 방, 관계를 끊어내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용기를 시험해보는 방, 형제 사이에서 만들어진 자리를 되짚어보는 방, 다섯 살의 기억을 다시 꺼내보는 방, 칭찬과 격려의 미묘한 차이를 가늠해보는 방,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는 방, 그리고 함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나를 확인하는 방을 지나 — 다시, 용기라는 말로 돌아온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동안, 부디 한 가지만 곁에 남겨두시길 바란다. "저는 원래 이래요"라는 말이,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렀을 때 조금은 다르게 들리기를. 지금은 그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 묻지 않겠다. 다만 함께 아홉 개의 방을 걸어본 뒤에, 다시 한번 물어보고 싶다.

당신마음속이야기 & 제주성교육센터 구영준 대표 상담사 네임택 — 상담 문의 010-2803-0613

제 1 장

원인이 아니라 목적

숲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갈림길

몇 해 전, 한 내담자가 상담실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저는 왜 자꾸 사람들과 가까워지려다가 먼저 밀어내는 걸까요." 나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는 초등학교 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 뒤로 사람을 믿는 게 무서워졌다고 했다.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원인과 결과가 깔끔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상담이 몇 회기 이어지면서, 나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지금, 이 관계를 밀어내면 당신에게 무엇이 남습니까."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적어도 다치지는 않죠."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과거의 상처가 그를 이렇게 만든 게 아니었다. 그는 지금,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람을 밀어내는 쪽을 "선택"하고 있었다. 원인이 아니라 목적이 그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됐는가,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는가

이 두 질문의 차이를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사람이 알프레트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의사였고, 한때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정신분석의 미래를 그리던 동료였다. 1902년 프로이트가 몇몇 의사들을 자신의 아파트로 초대해 만든 작은 토론모임에 아들러도 있었다. 그 모임은 커져서 1908년 빈 정신분석학회가 되었고, 1910년에는 아들러가 학회의 초대 회장까지 맡았다. 겉보기엔 프로이트의 가장 가까운 동료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는 순전한 제자가 아니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을 움직이는 힘을 유아기의 성적 충동에서 찾았다. 아들러는 처음부터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 신체의 약함(기관 열등감), 사회적 환경,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결국 1911년, 프로이트와의 마지막 충돌 뒤에 아들러는 몇몇 동료와 함께 빈 그룹을 떠나 독자적인 학회를 세운다. 그것이 곧 "개인심리학(Individual Psychology)"이 된다. 이름부터가 선언이었다. 라틴어 "individuus", 나눌 수 없는 것. 프로이트가 인간을 원초아·자아·초자아로 쪼개어 설명했다면, 아들러는 나눌 수 없는 전체로서의 인간을 세우려 했다.

흥미로운 것은, 흔히 두 사람의 결별과 함께 묶어서 이야기되는 카를 융의 이탈은 사실 별개의 사건이라는 점이다. 융은 아들러보다 2년 늦은 1913년경, 자신만의 "전체성"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해 떠났다. 아들러와 융이 손을 잡고 프로이트를 떠난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시점에, 다른 이유로 같은 스승과 갈라선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이 묘하게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결별조차 저마다의 방식으로, 저마다의 목적을 향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뒤에서 미는 힘과 앞에서 끄는 힘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차이를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효율적 원인(efficient causality)" — 뒤에서 미는 과거의 힘 — 을 중시했다. 아들러는 "최종 원인(final causality)" — 앞에서 끄는 미래의 목표 — 를 중시했다. 프로이트에게 인간은 과거에 의해 밀려가는 존재였다. 아들러에게 인간은 미래를 향해 스스로 나아가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그 "미래의 목표"란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사실일까. 아들러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철학자 한스 바이힝거의 "유용한 허구" 개념에서 힌트를 얻었다. 바이힝거는 인간이 궁극적 진리에 결코 도달할 수 없지만, 살아가기 위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사용하는 준거틀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아들러는 이것을 "가상적 목적론(fictional finalism)"이라는 개념으로 가져왔다. 인간은 유년기 초기에,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채 "허구적 최종 목표"를 만들어낸다. 완전한 안전, 혹은 완전한 의미를 얻은 어떤 상태에 대한 상상이다. 그 목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지만, 사람은 그 허구를 향해 매일의 결정을 내린다.

내 앞에 앉았던 그 내담자를 다시 떠올려본다. 그가 붙들고 있던 것은 "다치지 않는 삶"이라는 허구적 목표였다. 그 목표를 향해, 그는 매번 관계가 가까워질 때마다 먼저 물러나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었다. 과거의 배신은 계기였을 뿐, 지금 그를 계속 움직이는 것은 미래를 향한 그 목표였다.

목적을 묻는다는 것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아들러가 과거를 아예 무시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도 유년기의 경험, 가족 안에서의 위치, 몸의 약함이 사람에게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그 흔적이 사람을 "결정"한다고 보지 않았다. 흔적은 재료일 뿐이고, 그 재료로 무엇을 짓는가는 그 사람이 지금 향하고 있는 목적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는 원래 이래요"라는 말을 다시 들어본다. 그 말은 얼핏 과거를 가리키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지금의 어떤 목적을 감추고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실패의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 혹은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서. 원인을 캐묻는 대신 목적을 물어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이 질문을 상담실에서 던질 때마다, 내담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것을 본다. 방어하려던 자리에서, 잠시 멈추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자리로. 그 짧은 멈춤이 무엇을 만들어내는지는, 다음 장에서 열등감이라는 오래된 손님을 다시 마주하며 이야기해보려 한다.


제 2 장

열등감, 죄가 아니라 출발점

바위 틈에서 돋아난 작은 새싹

"저는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에요." 상담실에서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조금 다른 생각을 한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표정에는 대개 부끄러움이 섞여 있다. 마치 열등감이라는 것이, 남에게 들키면 안 되는 결함이라도 되는 것처럼. 언젠가 한 내담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저만 이런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다 자신감 있게 사는데."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정말 그럴까요? 열등감이 전혀 없는 사람을 본 적 있으세요?" 그는 한참 생각하다가, 아니라고 답했다.

그렇다. 열등감이 없는 사람은 없다. 이것이 아들러가 남긴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자주 오해받는 명제다.

몸의 약함에서 시작된 생각

아들러의 열등감 이론은 처음부터 심리적인 곳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1907년, 그는 『기관의 열등함과 그 심리적 보상에 관한 연구』라는 책을 썼다. 신체의 한 기관이 다른 기관보다 뚜렷하게 약할 때, 주변 기관들이 그 결함을 메우려 보상 작용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시력이 약한 사람이 유난히 청각이 예민해지는 식의 현상을 아들러는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이 관찰을 심리적 영역으로 확장했다. 몸이 약함을 느낄 때 사람은 심리적으로도 그것을 보상하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아들러는 조금씩 심리학의 중심으로 걸어 들어간다. 신체의 약함만이 아니라, 양육 과정에서, 낮은 사회적 지위의 경험에서, 혹은 단지 자신보다 크고 강한 어른들 사이에서 자라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은 열등감을 느낄 수 있다고 보았다. 아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보다 훨씬 크고 능력 있는 존재들 사이에서 살아간다. 그러니 열등감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찾아오는 병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조건 자체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다.

열등감과 열등감 콤플렉스는 다르다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아들러는 "열등감(inferiority feeling)"과 "열등감 콤플렉스(inferiority complex)"를 분명히 구분했다. 열등감은 정상적인 감정이다. 오히려 건강하고 정상적인 노력과 발전을 향한 자극이다. 아들러 학파에서 널리 인용되는 표현을 빌리면, 열등감이 병리적인 상태가 되는 것은 오직 그 부적절감이 개인을 압도해서, 그를 유용한 활동으로 이끌기는커녕 우울하게 만들고 발전할 수 없게 만들 때뿐이다.

그러니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과 열등감 콤플렉스에 갇힌 사람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전자는 부족함을 극복하려 노력한다. 후자는 그렇지 않다.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보다 회피하거나, 책임을 남에게 돌리거나, 자신의 열등감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그 자리에 멈춰버린다. 콤플렉스는 열등감을 감추려는 방어적 행동에서 시작된다 — 감정 자체가 아니라, 그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문제라는 뜻이다.

내가 상담실에서 만난 사람 중, 자신의 학력이 낮다는 사실에 늘 위축되어 있던 이가 있었다. 그는 회의 시간에 발언을 하지 않았고, 자신의 의견이 틀렸을 거라 미리 단정했다. 그런데 같은 학력을 가진 다른 내담자는 정반대였다. 그는 부족한 학력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현장 경험을 오히려 무기로 삼았다. 같은 조건, 같은 감정에서 출발했는데 두 사람의 길은 완전히 갈렸다. 열등감은 같았지만, 그것을 콤플렉스로 굳혔는가, 보상의 동력으로 썼는가가 달랐던 것이다.

보상, 그리고 그 끝에 있는 것

아들러는 이 동력을 "보상(compensation)"이라 불렀다. 열등감이 강할수록, 그것을 딛고 이루려는 목표는 더 높아진다는 것이 그의 핵심 명제다. 보상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발이 약한 아이가 몸을 단련해 결국 누구보다 튼튼한 다리를 갖게 되는 것처럼, 열등감은 인류가 이룩한 많은 진보의 뒤편에 있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물론 이 보상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발이 약하게 태어난 사람이 전문 무용수가 되겠다고 몸을 상하도록 몰아붙이거나, 가난했던 기억 때문에 쉼 없이 일에만 매달리는 경우가 그렇다. 이 과잉보상의 끝에서 사람들은 종종 우월감이라는 또 다른 얼굴을 만들어내는데, 이 이야기는 뒤에서 완벽주의를 다룰 때 다시 꺼내보려 한다. 지금은 다만 이렇게만 말해두고 싶다 — 열등감 자체는 죄가 아니다. 그것을 감추려고만 할 때, 비로소 문제가 시작된다.

출발점에 다시 서기

그렇다면 "저는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에요"라는 말은, 사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정직한 자기 진단일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감정을 인정한 뒤, 그것을 무엇으로 만들어갈 것인가. 나는 상담실에서 이 질문을 던질 때, 열등감을 없애라고 말하지 않는다. 없앨 수 없고, 없앨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감정을 "죄"로 만들지 말고 "출발점"으로 만들어보자고 제안한다.

앞서 1장에서 나는 "저는 원래 이래요"라는 말 뒤에 어떤 목적이 숨어 있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열등감도 마찬가지다. 그 감정 자체가 나를 결정짓는 게 아니라, 그 감정을 어떤 목적으로 쓸 것인가가 나를 만든다. 그런데 이 물음은 곧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 열등감을 남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다룰 것인가. 관계를 끊어내야 할까,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남아 있어야 할까. 다음 장에서는 그 질문을 따라가 본다.


제 3 장

미움받을 용기가 아니라 이해할 용기

닫힌 문 앞에 놓인 빈 의자들, 그중 하나만 색이 다르다

몇 년 전부터 상담실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입에서 부쩍 자주 듣게 된 문장이 있다. "저 이제 미움받을 용기 좀 가지려고요." 대개 그 뒤에는 관계를 정리하겠다는 이야기가 따라온다. 부모와의 거리를 두겠다, 친구 모임에서 빠지겠다, 상사의 부탁을 이제는 거절하겠다. 나쁜 방향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지키려는 시도로 반가울 때가 많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말이 조금 다른 방식으로도 쓰이는 걸 보게 되었다. "미움받아도 상관없어요, 저는 이제 아무한테도 안 맞춰요." 관계를 지키려는 용기가 아니라, 관계를 아예 끊어내려는 태도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잠깐 멈춰 서게 된다. 정말 아들러가 하려던 말이 그것이었을까.

사회적 관심이라는, 번역하기 어려운 말

아들러가 인간관계의 궁극적인 목표로 제시한 개념이 있다. 독일어로 "Gemeinschaftsgefühl(게마인샤프트게퓔)"이라 부르는 것인데, 이 말은 영어로도 "사회적 관심(social interest)"과 "공동체 감정(community feeling)" 두 가지로 주로 옮겨진다. 흥미로운 건, 두 번역 모두 이 개념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해서, 실은 둘을 함께 놓아야 그 뜻이 겨우 완성된다는 지적이 있다는 점이다. "공동체(Gemeinschaft)"와 "감정(Gefühl)"이 결합된 이 말은, 소속감과 협력, 사회적 연결감, 그리고 타인의 안녕에 대한 관심을 모두 가리킨다.

아들러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자신에게 기여함으로써 가치와 소속감을 느끼는 것, 그것이 사회적 관심이라고. 그리고 이 감정은 우월성을 향한 노력처럼 본능적으로 타고나는 것이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사회적 관심은 반드시 "계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홀로 있는 상태에서는 결코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 오직 사회적 맥락 안에서만 생명을 얻는다.

다시 말해, 사회적 관심은 관계를 끊었을 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 남아서 무언가를 길러낼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미움받을 용기』와 원전 사이의 거리

여기서 잠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한국에서 이 논의를 촉발한 책은 사실 아들러 본인이 쓴 것이 아니다. 일본의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와 작가 고가 후미타케가 아들러 심리학을 참고해 쓴 대화체의 책, 『미움받을 용기』다. 2013년 일본에서, 2014년 한국에서 출간되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 책이 소개한 개념 중 하나가 "과제분리"다.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지를 먼저 생각하고, 내 과제와 타인의 과제 사이에 냉정하게 선을 그어, 서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개념이다. 나는 이 개념 자체를 나쁘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휘둘리던 사람들에게는 숨통을 틔워주는 말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책도 소속감이 가만히 있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공헌해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 이 지점은 원전의 취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과정에서, "미움받을 용기"라는 제목 자체가 관계를 끊어내는 용기로 읽히기 시작했다. 사회 구조나 관계의 문제를 개인의 용기 문제로 축소시켜, 결국 "각자도생"의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원전에서 사회적 관심은 소속감·협력·기여를 뜻했지만, 그 제목의 대중적 수용은 오히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관계를 정리하는 것으로 옮겨간 셈이다. 어느 해석이 맞고 틀리다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책에서는, 적어도 아들러가 본래 가리켰던 방향을 함께 짚어보고 싶다.

과제분리는 단절이 아니라 전제조건이다

그렇다면 "과제분리"는 관계를 끊기 위한 도구였을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건강한 사회적 관심을 회복하기 위한 전제조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내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문제까지 자신이 짊어지느라 지쳐서 결국 관계 자체를 피하게 된다. 반대로 그 경계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지치지 않고 관계 안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다. 선을 긋는 것은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머물기 위해서다.

한 내담자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는 어머니의 모든 감정을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믿으며 살았다. 어머니가 슬퍼하면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다고 여겼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머니의 슬픔은 어머니의 과제"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가 어머니와의 관계를 끊은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는 그 이후로 어머니를 더 자주 찾아갔다. 감정을 대신 짊어지지 않아도 되니, 관계 자체가 훨씬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대신 이해하는 쪽으로

그러니 나는 이 챕터의 제목을 이렇게 정했다. 미움받을 용기가 아니라, 이해할 용기. 관계를 끊어내는 용기보다 어려운 것은, 관계 안에 남아서 타인을 — 그리고 나 자신을 — 이해하려는 용기다.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그 다음에 남는 진짜 과제는, 미움받을지도 모르는 그 자리에 계속 서서, 상대와 나 사이의 거리를 정직하게 가늠하는 일이다.

"저는 원래 이래요"라는 말이 이번에는 이렇게 변주된다. "저는 원래 사람들이랑 잘 안 맞아요. 그러니 굳이 애쓰지 않을래요." 그러나 사회적 관심은 애쓰지 않고는 자라지 않는다. 다음 장에서는 그 관계가 처음 만들어지는 자리, 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공동체로 들어가 본다. 형이 있어서, 막내라서 — 라는 말 속에 숨어 있는, 자리 다툼의 기억으로.


제 4 장

형이 있어서, 막내라서

노을 진 골목에 나란히 선 두 아이의 실루엣

"저는 둘째라서 그래요." 형제 문제로 상담실을 찾은 한 내담자가 말했다. 그는 늘 눈치가 빠르고, 협상에 능했고, 누구와도 큰 갈등 없이 지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는 데는 유난히 어려움을 느꼈다. "형은 늘 첫째답게 자기주장이 강했어요. 저는 그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게 익숙해졌죠." 그의 말은 그럴듯했다. 실제로 그가 살아온 자리를 생각하면, 그런 습관이 생길 만도 했다.

그런데 같은 날 오후, 나는 정반대의 사례를 만났다. 역시 둘째였는데, 이 사람은 오히려 형보다 더 강하게 자기 목소리를 냈다. 어릴 때부터 "형만큼 인정받으려면 더 세게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같은 자리, 다른 반응. 둘 다 "둘째라서"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가리키는 방향은 완전히 달랐다.

가족이라는 첫 번째 사회

아들러는 이 자리의 힘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가족구도(family constellation)"라는 말로, 가족 안에서 각 구성원이 차지하는 고유한 자리를 설명했다. 우리가 태어나 처음 만나는 사회 시스템이 가족이고,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이후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의 원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첫째로 태어나느냐, 둘째로 태어나느냐, 막내로 태어나느냐 — 이 시간적 위치는 아이에게 고유한 심리적 환경을 만들어내고, 그 환경은 아이가 소속감을 얻기 위해 넘어서야 할 구체적인 과제를 결정짓는다.

이 통찰에서 흔히 대중적으로 정리되는 그림이 있다. 첫째는 책임감이 강하고 성취를 지향하며 리더십을 보인다. 둘째는 생존을 위해 눈치와 협상력을 기르고, 관계에서 유연한 평화 유지자 역할을 한다. 막내는 자유롭고 낙천적이지만, 부모의 관대한 양육 속에서 스스로 결정할 기회가 적었기에 결정을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다. 외동은 오히려 관계에 여유롭다. 자라면서 혼자라는 감각을 일찍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그림을 들으면 사람들은 대개 고개를 끄덕인다. 나 역시 상담실에서 이 틀이 꽤 잘 들어맞는 순간들을 목격했다. 그러나 딱 그 순간까지다.

그런데, 과학은 다르게 말한다

여기서 나는 조심스러워질 필요를 느낀다. 지난 수십 년간 심리학자들은 출생순서가 실제로 성격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대규모로 검증해왔다. 45년 전의 메타분석부터 2015년의 대규모 표본 연구까지, 여러 분석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 것은 뜻밖의 결과였다. 외향성, 정서적 안정성, 우호성, 성실성, 개방성 같은 성격 특성에서, 출생순서의 효과는 발견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는 지능과 자기 보고 지적 능력이었는데, 여기서는 첫째가 아주 근소하게 더 높은 점수를 보였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연구자들은 방법론의 문제를 짚는다. 형제자매를 같은 시점에 검사하면, 첫째는 언제나 나이가 더 많다. 그러니 첫째가 더 성실해 보이는 건 단지 나이가 많아서일 뿐, 출생순서 자체의 효과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백 개의 연구가 출생순서 효과에 대해 서로 크게 다른 결과를 내놓았는데, 이는 표본이 작고 대표성이 떨어지는 연구 설계가 만연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심지어 "첫째는 보수적이고 막내는 반항적이다"라는 유명한 주장을 담았던 어느 책의 근거를, 후속 연구자들이 다시 검증했을 때는 그 패턴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니 수십 년의 연구 끝에 지금 심리학이 내놓는 결론은 명확하다. 출생순서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아들러는 틀렸는가

여기서 나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다. 아들러가 관찰한 것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가 본 것은 "가족 안에서의 상대적 위치가 아이가 느끼는 심리적 환경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임상적 통찰이었지, "몇째로 태어났으니 이런 사람이 된다"는 결정론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통찰이 대중적으로 옮겨지면서, 마치 별자리 운세처럼 단순화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내가 만났던 두 명의 둘째를 다시 떠올려본다. 한 사람은 눈치를 보는 쪽으로, 다른 사람은 더 세게 나가는 쪽으로 그 자리를 해석했다. 같은 위치에서 시작했지만, 그 위치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각자가 정한 것이었다. 이것은 결국 1장에서 이야기한 목적론으로 다시 이어진다. 가족 안의 자리는 재료일 뿐, 그 재료로 무엇을 지을지는 각자의 몫이라는 것.

형이 있어서, 막내라서 — 그 다음

그러니 "형이 있어서", "막내라서"라는 말은 사실을 말하고 있지만, 전부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 말은 어떤 자리에서 시작했는지를 알려줄 뿐, 그 자리에서 무엇을 만들어냈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나는 상담실에서 이 말을 들을 때, 굳이 그 틀을 깨려 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를 더 묻는다. "그 자리에서, 당신은 무엇을 지키려고 그렇게 반응하게 되었나요."

그 질문에 답을 찾아가다 보면, 사람들은 종종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린다. 대개는 다섯 살 무렵의, 유난히 또렷한 한 장면이다. 다음 장에서는 그 장면이 어떻게 지금의 우리를 비추고 있는지를 들여다본다.


제 5 장

다섯 살의 기억이 지금의 나를 설명한다

흑백 사진첩을 손으로 넘기는 모습

"가장 어릴 때 기억나는 장면이 뭐예요?" 나는 상담 초반에 종종 이 질문을 던진다. 처음에는 다들 당황한다. "그런 걸 왜요?"라고 되묻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여는 순간, 대부분은 뜻밖으로 구체적인 장면을 꺼낸다. 어느 내담자는 다섯 살 무렵, 마당에서 혼자 놀다가 넘어졌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던 순간을 기억했다. 또 다른 내담자는 같은 나이에, 동생이 태어난 날 병원 복도에서 혼자 서 있던 장면을 떠올렸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 모두 그 기억을 "그냥 우연히 남은 장면"이라고 여겼다는 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억은 선택된다

아들러는 초기기억(early recollection)을 개인심리학의 중요한 도구로 삼았다. 그의 관점은 도발적이다. 그는 우리의 초기기억이 실제로 있었던 일을 사실 그대로 담고 있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기억은 선택된 알림이다." 우리는 유년기의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 지금 자신과 타인과 세계를 보는 관점과 일치하는 사건만을 골라서 기억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섯 살의 그 장면은 다섯 살 때의 진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나 자신에게 하고 있는 이야기에 더 가깝다. 넘어졌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던 기억을 붙들고 있는 사람은, 지금도 "결국 나를 도와줄 사람은 없다"는 믿음을 어딘가에 품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동생이 태어난 날 혼자 서 있던 기억을 붙들고 있는 사람은, 지금도 자신이 언제든 밀려날 수 있다는 감각과 씨름하고 있을지 모른다. 아들러의 말을 빌리면, 초기기억은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의 철학을 담은 메타포다. 누가 있었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결과가 어땠는지 — 그 안에 생활양식의 핵심 주제와 근본적인 가정이 압축되어 있다.

그렇다고 거짓말은 아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 말이 "당신의 기억은 가짜다"라는 뜻은 아니다. 그 장면은 실제로 있었을 수도, 여러 사건이 뒤섞인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사실 여부가 아니라, 그 수많은 장면 중에서 "왜 하필 이 장면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들러 학파의 상담자들은 이 지점에서 정확성을 캐묻지 않는다. 대신 그 기억이 지금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를 함께 들여다본다.

넘어졌을 때 아무도 오지 않았다던 그 내담자와 나는, 그 장면을 여러 번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이렇게 말했다. "그때 저는 울지 않았어요. 혼자서 일어났죠." 나는 물었다. "그 사실이 지금 당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답했다. "저는… 누군가 안 와도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었네요." 같은 장면인데도, 처음에는 "버려짐"의 증거였던 기억이, 다시 보니 "회복력"의 증거로 읽히기 시작했다. 기억은 바뀌지 않았다. 그 기억을 향한 그의 목적이 바뀐 것이다.

상담실에서 이 기억을 다루는 법

실제로 아들러식 상담에서 초기기억을 수집하는 일은 대개 생활양식을 파악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 놓인다. 가족 안에서의 위치, 반복되는 꿈, 삶에서 우선시하는 과제들과 함께 초기기억을 모아 전체를 하나로 통합해 해석한다. 이 작업이 단지 "당신은 이런 사람이군요"라는 진단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초기기억을 다시 꺼내어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과정 자체가 변화를 만들어낸다고 알려져 있다. 이야기치료가 사람들에게 삶의 중요한 주제를 담은 이야기를 표현하도록 돕는 방식의 뿌리 역시, 이 초기기억 기법에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나는 조금 놀랐다.

원인이 아니라, 지금의 목적이 고른 과거

여기까지 오면, 1장에서 던졌던 질문이 다시 떠오른다. 원인이 아니라 목적. 다섯 살의 기억은 원인처럼 보인다. "그때 그런 일이 있었으니 지금 내가 이렇다"는 식으로.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방향이 반대다. 지금의 내가 어떤 목적을 향해 있기에, 그 목적과 어울리는 다섯 살의 장면을 골라서 붙들고 있는 것이다. 기억이 나를 만든 게 아니라, 내가 그 기억을 계속 살려두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기억을 다르게 붙들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실제로 상담실에서 나는 그 전환이 일어나는 순간을 여러 번 보았다. 물론 이 전환이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 사이에는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필요하다. 다음 장에서는 그 말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칭찬과 격려라는 아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두 단어를 놓고 이야기해보려 한다.


제 6 장

칭찬이 아니라 격려

노을빛 속에서 서로를 향해 뻗은 두 손

한 부모가 상담실에 와서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이한테 칭찬을 그렇게 많이 해주는데도, 점점 자신 없어 해요." 나는 어떻게 칭찬하는지 물었다. 그는 "시험 잘 봤을 때 '너 진짜 잘했다, 최고야'라고 해줘요"라고 답했다. 얼핏 문제없어 보였다. 그런데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조금 다른 그림이 보였다. 아이는 시험을 못 본 날에는 부모에게 결과를 아예 말하지 않았다. "잘했을 때만 저를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아이의 말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들러와 그의 제자 루돌프 드레이커스가 남긴 구분 하나를 떠올린다. 칭찬과 격려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이라는 구분이다.

잘못된 행동을 하는 아이는, 낙담한 아이다

드레이커스는 아들러의 관점 — 인간의 중심 동기는 소속감이라는 것 — 을 이어받아 훈육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의 핵심 명제 중 하나는 이렇다. "잘못된 행동을 하는 아이는 낙담한 아이다." 아이가 말을 안 듣거나 반항하는 것은 나쁜 본성 때문이 아니라, 소속되고자 하는 희망이 어딘가에서 좌절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좌절이 네 단계를 거친다고 보았다. 먼저 아이는 관심을 얻으려 한다. 관심으로도 안 되면 힘을 통해 존재감을 확인하려 한다. 그마저 통하지 않으면 복수의 방식으로 나아가고, 결국에는 스스로 부적절하다고 느끼며 물러선다.

이 관점에서 보면, 훈육의 목표는 벌을 주는 게 아니라 낙담을 되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되돌림의 핵심 도구가 바로 격려다.

행위를 격려하라, 행위자를 칭찬하지 말라

드레이커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행위를, 혹은 노력을 격려하라. 행위자를 칭찬하지 말라." 예를 들어 "너 A 받았구나,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대신, "축하해, 정말 열심히 했구나"라고 말하는 식이다. 미묘한 차이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완전히 다른 구조가 숨어 있다.

칭찬은 언제나 평가와 판단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평가는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만 주어진다. 반면 격려는 결과가 좋지 않을 때도 줄 수 있다. 칭찬은 성취에 초점을 맞추지만, 격려는 노력과 향상에 초점을 맞춘다. 그 차이는 곧 동기의 방향을 바꾼다. 칭찬을 반복적으로 받은 아이는 점점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결과가 나쁠까 봐 시도 자체를 피하게 될 수 있다. 반면 격려를 받은 아이는 성공이 우연이나 남의 인정에서 오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이라고 믿게 된다. 앞서 이야기했던 그 아이가 시험 성적을 숨기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는 잘한 결과에만 주어지는 사랑을, 언제 끊길지 모르는 것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만이 아니라, 어른들의 관계에서도

이 구분은 부모와 자녀 사이에만 머물지 않는다. 나는 직장 내 관계 상담에서도 같은 패턴을 자주 본다. "잘했어, 최고야"라는 상사의 말을 들은 팀원이 오히려 다음 프로젝트를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다. 그 칭찬이 사실은 "이번처럼 못하면 안 된다"는 무언의 기준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번에 시도한 방식이 흥미로웠어요, 결과가 어떻든 그 접근은 배울 점이 있었어요"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다음에도 새로운 시도를 이어갈 힘을 얻는다. 결과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과정에 대한 인정 — 그것이 격려가 만들어내는 차이다.

드레이커스는 이 원리를 가정 안에서 실천할 방법으로 "민주적 가족 회의"를 제안했다. 벌을 주고받는 자리가 아니라, 정기적으로 모여 각자의 입장을 동등하게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처벌 대신 논리적이고 자연스러운 결과를 통해 배우게 하고, 그 과정 전체를 격려로 감싸는 방식이다. 나는 이 방식이 가정에만 국한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팀 회의도, 부부 사이의 대화도, 같은 원리로 다르게 흘러갈 수 있다.

칭찬받아야만 괜찮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돌아보면, "저는 원래 이래요"라는 말도 어쩌면 오랫동안 칭찬만 받고 격려는 받지 못한 결과일지 모른다. 결과가 좋을 때만 인정받아온 사람은, 결과가 나쁠 때의 자신을 감당할 언어를 배우지 못한다. 그러니 "원래 이런 사람"이라는 말로 미리 선을 그어버리는 것이다 — 실패해도 상처받지 않으려고.

나는 이제 상담실에서 누군가를 격려할 때, 결과를 앞세우지 않으려 애쓴다. "이번엔 어떻게 되든, 이렇게 다시 마주 앉은 것 자체가 의미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이 통할 때,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는 걸 본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는 안도가 스친다. 그런데 이 안도가 지나쳐, 아예 더 나아가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을 벗어나려다, 이번에는 다른 극단으로 가는 경우다. 다음 장에서는 그 반대편, 완벽주의라는 또 다른 얼굴을 들여다본다.


제 7 장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금박이 벗겨진 채로 그릇에 담긴 달걀들

"저는 실수하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한 내담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이 말을 자책이 아니라 오히려 자부심처럼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그는 회사에서 늘 완벽한 결과물을 내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밤을 새워서라도 오류를 없앴고, 남의 실수를 보면 참지 못했다. 그런데 몇 회기가 지나면서, 그가 진짜 두려워하는 것이 드러났다. 완벽하지 않은 순간의 자신을,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다는 두려움이었다.

나는 이 모습을 상담실에서 여러 번 마주쳤다.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사람의 안쪽에, 사실은 가장 깊은 열등감이 웅크리고 있는 경우를.

우월성 추구와 우월 콤플렉스는 다르다

2장에서 나는 열등감이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며, 그것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고 이야기했다. 아들러는 이 감정을 딛고 나아가려는 자연스러운 힘을 "우월성 추구(striving for superiority)"라고 불렀다. 여기서 "우월"이라는 말이 남을 이기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타인보다 낫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더 많이 실현한다는 뜻이다. 이 추구는 인간의 보편적 욕구이며, 아들러는 열등감이야말로 인류가 이룩한 모든 진보의 뒤편에 있는 원동력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런데 이 자연스러운 힘이 어긋난 방식으로 쓰이면, 아들러가 "우월 콤플렉스(superiority complex)"라고 부른 것이 된다. 우월 콤플렉스는 타인을 지배하고 앞세워야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핵심인데 — 이 콤플렉스는 우월함의 증거가 아니라, 깊이 숨겨진 채 해결되지 않은 열등감 콤플렉스에 대한 과잉보상이다. 힘과 완벽함을 향한 그 과장된 추구는, 실은 자신의 근본적인 불안정성을 가리기 위한 높은 벽이다.

내가 만났던 그 완벽주의자를 다시 생각해본다. 그는 실수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애썼지만, 그 애씀의 뿌리에는 "실수하면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오래된 믿음이 있었다. 완벽함은 그가 쌓아 올린 벽이었다. 그 벽 뒤에 숨은 것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꼈던 아주 오래된 감정이었다.

신경증적으로 완벽을 좇는다는 것

완벽을 향한 이런 추구는 겉보기엔 그럴듯한 해법처럼 보인다. 절대적으로 완벽해지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자기 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것은 착시에 가깝다. 완벽을 향한 자연스러운 노력이 삶의 유용한 방향 — 즉 타인과 협력하고 기여하는 방향 — 에서 벗어나, 오직 자기중심적이고 때로는 사회적으로 파괴적인 힘의 추구로 방향을 틀 때, 아들러는 이것을 신경증의 한 표현으로 보았다. 자신에 대한 진짜 평가가 아니라, 허위로 부풀린 평가에 매달리는 상태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아들러가 정리한 생활양식의 네 유형 중 하나를 떠올린다. 그는 사회적 관심의 정도와 삶의 문제에 접근하는 활동성을 기준으로 사람의 생활양식을 지배형, 기생형, 회피형, 그리고 사회적으로 유용한 형으로 나누었다. 지배형은 사회적 관심과 용기가 부족한 채로, 힘과 통제를 통해서만 자신의 중요성을 느끼려 한다. 완벽주의로 자신을 밀어붙이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겉으로는 성취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 지배형에 가까운 방식으로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다. 완벽함으로 타인을 압도하려는 것도, 결국은 힘을 통한 존재 증명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소속될 수 있다면

내가 그 내담자에게 실제로 물었던 것은 이런 질문이었다. "실수한 당신을, 곁에 있는 사람들이 정말 밀어낼까요?" 그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몇 주가 지나 그는 작은 실수를 동료 앞에서 인정하는 실험을 해보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동료가 "저도 그런 적 있어요"라며 웃었다고 했다.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완벽함이 소속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이 지점에서 나는 3장에서 이야기한 사회적 관심을 다시 꺼내오고 싶다. 완벽주의는 결국 혼자서, 남들의 도움 없이 완전해지려는 시도다. 그러나 아들러가 말한 사회적 관심은 정반대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그 부족함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채워가는 것.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애초에 우리가 완벽해서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기대며 함께 있어서 온전해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니 "저는 실수하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라는 말도, 결국은 "저는 원래 이래요"의 또 다른 얼굴이다. 완벽이라는 이름의 벽 뒤에 낙담을 숨겨둔 것이다. 나는 이 벽을 허물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벽 뒤에 있는 사람에게, 벽 없이도 있어도 되는 자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그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것이 결국 누군가와 함께 있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다음 장에서는 그 협력의 자리, 함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나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제 8 장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나

노을 속에서 어깨동무하고 함께 걷는 사람들의 실루엣

몇 년 전, 나는 몇 사람을 모아 소규모 그룹상담을 진행한 적이 있다. 참가자 대부분은 저마다의 이유로 관계에서 상처를 입고, 혼자 있는 게 더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첫 회기, 한 참가자가 조심스레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예상과 달리, 방 안의 누구도 그를 판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참가자가 "저도 비슷한 일이 있었어요"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붙였다. 그 순간 나는 그 사람의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다. 혼자 짊어지고 있던 무게가, 방 안에 나누어지는 것을 느끼는 표정이었다.

그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혼자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완성되어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기여에서 오는 건강함

3장에서 나는 아들러가 말한 사회적 관심(Gemeinschaftsgefühl)이 관계를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 남아 기여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보자. 아들러에게 진정한 심리적 건강은 기여와 공유된 책임에서 온다. 웰빙은 혼자만의 성취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와 집단행동을 통해 길러지는 것이라는 관점이다. 그는 사람들이 타인과의 연결 속에서 치유되고 성장한다는 것을 일찍이 인식하고, 가족상담과 그룹상담을 가장 먼저 실천한 사람 중 하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관점이 상담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되는지를 보면, 몇 가지 공통된 방향이 보인다. 공동체 활동이나 자원봉사에 참여하도록 독려하는 것,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공감 능력을 기르도록 돕는 것, 사회적 관심을 가로막는 잘못된 믿음을 함께 들여다보고 도전하는 것, 그리고 상담 관계 자체를 평등과 협력의 자리로 만드는 것.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사람을 홀로 완성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소속감은 조건 없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학자들은 "공동체 의식"을 몇 가지 요소로 나누어 설명한다. 구성원으로서의 소속감, 구성원과 공동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 공동체의 자원과 협력을 통해 필요가 채워지는 경험, 그리고 구성원들 사이의 공유된 정서적 유대. 이 네 가지가 함께 있어야 비로소 "소속되어 있다"는 감각이 완성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정의를 보면서, 소속감이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가만히 있는다고 소속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서로에게 무언가를 내어주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된다. 그룹상담에서 있었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려본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꺼냈고,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것을 내어주었다. 그 교환이 없었다면, 그 방은 그저 같은 시간에 모여 앉은 사람들의 집합이었을 뿐, 공동체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상담실 밖에서도, 직장에서도

이 통찰은 상담실을 넘어 훨씬 넓은 자리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는 듯하다. 최근의 조직심리학 연구들은 직장 내 소속감이 단순히 "분위기가 좋다"는 차원을 넘어, 구성원의 몰입과 이직률, 심리적 안전감에까지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소속감은 정직한 대화와 창의적인 시도, 그리고 어려움을 견디는 힘을 만들어내는 심리적 안전감의 토대가 된다. 조직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는 사람은 조직의 변화 앞에서도 더 잘 견디고, 더 오래 그 자리에 남는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소속감을 만드는 방법으로 연구자들이 제시하는 것 역시 "인정의 문화"다. 모든 구성원의 기여가 가치 있다는 것을 반복해서 확인시켜주는 문화가, 조직을 단순한 집합에서 공동체로 바꾼다는 것이다. 백여 년 전 아들러가 상담실에서 이야기했던 것과, 오늘의 조직심리학이 회의실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이렇게 겹쳐지는 걸 보면서,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완벽이 아니라 함께함

7장에서 나는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이야기하며, 우리가 완벽해서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기대며 온전해지는 존재라고 말했다. 이 장에서는 그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완성해보고 싶다. 우리는 혼자서 완성될 수 없다. 완성은 완벽이라는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기여와 협력이라는 관계의 산물이다. 열등감을 딛고(2장), 관계를 끊지 않고 이해하려 하고(3장), 완벽하지 않은 채로 곁에 머물 때(7장),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통해 완성되어간다.

그룹상담이 끝나갈 무렵, 처음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던 그 참가자가 마지막 회기에 이렇게 말했다. "혼자 있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여기 있는 게 더 안전했어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결국 우리가 상담실에서, 그리고 삶에서 찾고 있는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이 안전함이 아닐까. 그리고 이 안전함을 만드는 힘, 그 모든 장을 관통해온 단 하나의 단어를 이제는 다시 꺼내볼 때가 되었다. 용기라는 단어를.


제 9 장

다시, 용기

어두운 실내에서 밝은 문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의 실루엣

책의 마지막 본문 장을 앞두고, 나는 그동안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보았다. 관계를 먼저 밀어내던 사람, 자신을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라 부르던 사람,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겠다며 사실은 관계를 끊으려 했던 사람, 둘째라서 눈치를 본다던 사람, 다섯 살의 기억 하나를 붙들고 있던 사람, 칭찬받을 때만 안심하던 아이, 실수하면 안 된다고 믿던 완벽주의자, 혼자 있는 게 안전하다고 여기다가 그룹 안에서 처음으로 안전함을 느낀 사람. 서로 다른 얼굴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이 모든 이야기의 밑바닥에는 같은 단어가 흐르고 있었다. 용기.

그렇다. 이 책의 제목처럼, 결국은 용기의 문제였다.

원인이 아니라 목적을 볼 용기

1장에서 나는 원인론과 목적론의 차이를 이야기했다. "왜 그렇게 됐는가"를 묻는 대신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는가"를 묻는 것. 이 전환에는 사실 용기가 필요하다. 과거를 탓하는 것은 편하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나는 그저 그 결과일 뿐이라고 말하면, 지금의 선택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목적을 묻는 순간,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를 선택하고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선택하는 사람에게는 책임이 따른다. 그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첫 번째 용기였다.

열등감을 감추지 않을 용기

2장에서는 열등감이 죄가 아니라 출발점이라고 이야기했다. 열등감을 인정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저는 열등감이 없어요"라고 말하고 싶어 하지만, 그 말 자체가 열등감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일 때가 많다. 부족함을 감추지 않고 "네, 저는 이 부분이 부족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감정은 보상이라는 동력으로 바뀔 기회를 얻는다. 감추는 순간 그것은 콤플렉스로 굳어지고,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출발점이 된다.

관계 안에 남을 용기

3장과 8장은 결국 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하고 있었다. 관계를 끊어내는 것은 오히려 쉬운 선택일 수 있다. 진짜 어려운 것은 미움받을 수도 있는 그 자리에 남아서,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사회적 관심은 혼자 있을 때는 자라지 않는다. 오직 관계 속에서, 기여하고 기여받는 과정 속에서만 살아 움직인다. 완성은 결국 함께 있을 때 온다는 것을, 8장의 그 그룹상담이 보여주었다.

완벽하지 않을 용기

7장에서는 완벽주의라는 벽을 이야기했다. 완벽해지려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은, 완벽하지 않은 채로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다. 벽을 세우는 데는 힘이 필요하지만, 그 벽을 허물고 부족한 채로 남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완벽해서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부족한 채로도 곁에 머물 수 있어서 사랑받는 존재다.

그러니, 오늘의 작은 시도

이 책을 여기까지 읽어온 당신에게, 나는 거창한 결심을 요구하고 싶지 않다. 아들러가 말한 용기는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선택 속에서 조금씩 길러지는 것이었다. 그러니 오늘 시도해볼 수 있는 아주 작은 것들을 몇 가지 남겨두고 싶다.

오늘 누군가에게 "잘했다"는 말 대신 "애썼다"는 말을 건네보는 것. 오늘 하나의 실수를 굳이 숨기지 않고 그대로 말해보는 것. 오늘 관계를 정리하기 전에, 한 번만 더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 오늘 "저는 원래 이래요"라고 말하려던 순간, 그 말을 삼키고 대신 "저는 지금 이런 선택을 하고 있네요"라고 바꿔 말해보는 것.

이 중 무엇이든 하나만 해도 충분하다. 용기는 크기로 증명되지 않는다. 다만 방향으로 증명된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아주 작게라도 다른 방향으로 한 발을 떼는 것. 그것이 아들러가 백 년 전 상담실에서 사람들에게 건네고 싶었던 말이었을 거라고, 나는 지금도 믿는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다. 이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들었던 그 말, "저는 원래 이래요"가 지금 당신에게 어떻게 들리는지 — 마지막 장에서 함께 확인해보자.


에필로그 — 그럼에도, 다르게 살아보기로 했다

햇빛이 비치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

상담이 끝나면 나는 늘 문 앞에 서서 사람들을 배웅한다. 그 짧은 순간, 뒷모습을 보는 일이 나에게는 오래도록 남는 습관이 되었다. 처음 상담실에 들어올 때의 어깨와,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난 뒤 문을 나서는 어깨는 신기하게도 다르다. 무엇이 달라졌는지 정확히 말로 옮기기는 어렵다. 다만 그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는 이 책의 첫 장에서 던졌던 그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저는 원래 이래요."

돌아보면 이 책은 그 한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상담실에서 수없이 들었던 그 말, 그 뒤에 숨어 있던 낙담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원인이 아니라 목적을 물었던 1장, 열등감을 죄가 아니라 출발점으로 다시 세운 2장, 미움받을 용기가 아니라 이해할 용기를 이야기한 3장, 형제 사이의 자리를 되짚어본 4장, 다섯 살의 기억을 다시 꺼내본 5장, 칭찬과 격려를 구분한 6장, 완벽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찾은 7장,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나를 확인한 8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용기라는 한 단어로 묶어본 9장까지 — 아홉 개의 방을 지나오는 동안, 그 말은 조금씩 다른 얼굴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런데 이제 이 말을 다시 들으면, 예전과 같은 무게로 들리지 않는다. "저는 원래 이래요"라는 말은 여전히 사실을 담고 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의 역사가 있고, 그 역사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 말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흔적을 가지고 무엇을 지을지는, 언제나 지금의 우리에게 달려 있었다.

상담실 문을 나서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들이 과거를 지워버린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배신당했던 기억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형이 있었던 자리도, 넘어졌을 때 아무도 오지 않았던 그 다섯 살의 오후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그 기억을 붙들고 있던 손의 힘을 조금 풀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손으로, 이전과는 다른 것을 붙잡기 시작했다.

그러니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쓰고 싶다. "저는 원래 이래요"라는 말이 끝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말 뒤에는 언제나 다음 문장이 이어질 자리가 남아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자리에, 이제는 조금 다른 말을 넣어볼 수 있다는 것을 — 그럼에도, 다르게 살아보기로 했다고.


참고 자료

이 책의 각 장은 아래 자료를 근거로 아들러(Alfred Adler)의 개인심리학 개념을 정리했다. 상담 사례는 모두 실명·특정 가능한 개인정보를 배제하고 여러 사례를 재구성한 것이다.

전체 출처 목록과 챕터별 상세 리서치 노트는 manuscript.md 및 chapters/각 폴더의 research.md에 있습니다.